출생 158년 — 정시 2년(241) 졸 향년 84세로 역산
사망 241년 — 정시 2년 졸
| 연도 | 지명 | 직책 | 근거 |
|---|---|---|---|
| 195년 | 양평(襄平) | (요동으로 피난) | 추정 |
| 200년 | 양평(襄平) | (요동에서 은거) | 추정 |
| 223년 | 양평(襄平) | (요동 은거) | 기록 |
근거 칸의 「추정」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.
| 연도 | 소속 | 직책 | 근거 |
|---|---|---|---|
| 184~194년 | 기타·재야 | (북해 주허 출신, 16세에 아버지를 여읨) | 불명 |
| 195년 | 기타·재야 | (요동으로 피난) | 추정 |
| 196~199년 | 기타·재야 | (요동으로 피난) | 불명 |
| 200년 | 기타·재야 | (요동에서 은거) | 추정 |
| 201~222년 | 기타·재야 | (요동에서 은거) | 불명 |
| 223년 | 기타·재야 | (요동 은거) | 기록 |
| 224~226년 | 위 | (귀향) | 불명 |
| 227~241년 | 기타·재야 | (귀향 은거) | 불명 |
화흠·병원과 함께 공부하다 난리에 공손도의 영이 해외에서도 행해진다는 말을 듣고 병원·왕열과 함께 요동으로 가 산골짜기에 초가를 짓는다.
정사 관녕전: 평원 화흠, 같은 현 병원과 친구로 함께 유학했다.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공손도의 영이 해외에서도 행해진다는 말을 듣고 병원·평원 왕열 등과 요동에 갔다. 공손도가 빈 관사를 비워 맞았으나 관녕은 산골짜기에 초가를 짓고 피난자들이 남쪽에 많이 머물렀지만 북쪽에 살며 옮길 뜻이 없음을 보였고 이후 사람들이 따랐다. 연도는 본문에 없고 추정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11 「遂與原及平原王烈等至于遼東」
조조가 사공이 되어 관녕을 불렀으나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이 명을 끊고 전하지 않는다.
정사 관녕전: 태조가 사공이 되어 관녕을 불렀으나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이 명령을 막아 전하지 않았다. 연도는 본문에 없고 조조 사공 시기로 추정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11 「度子康絕命不宣」
황초 4년 조서로 공경에게 독행군자를 천거하라 하자 사도 화흠이 관녕을 천거한다.
정사 관녕전: 중국이 조금 안정되자 객들이 모두 돌아갔으나 관녕은 홀로 끝까지 있을 듯 태연했다. 황초 4년 조서로 공경이 독행군자를 천거하게 하자 사도 화흠이 관녕을 천거했다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11 「司徒華歆薦寧」
문제가 즉위해 관녕을 불러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군으로 돌아오자 공손공이 남교까지 전송하고, 요동에서 받은 선물을 모두 봉해 돌려준다. 태중대부 임명은 굳이 사양한다.
정사 관녕전: 문제가 즉위해 관녕을 부르자 관녕은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군으로 돌아왔고 공손공이 남교까지 전송하며 의복과 물품을 더했다. 관녕이 동으로 간 뒤 공손도·강·공이 앞뒤로 보낸 것을 모두 받아 보관했다가 서쪽으로 건넌 뒤 모두 봉하여 돌려보냈다. 조서로 태중대부에 임명했으나 굳이 사양했다. 연도는 본문에 없고 문제 즉위 직후(224)로 둠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11 「遂將家屬浮海還郡」
명제가 즉위하자 태위 화흠이 관직을 양보하려 하고, 관녕은 「초망신」이라 칭하며 사양하는 글을 올린다.
정사 관녕전: 명제가 즉위하자 태위 화흠이 관직을 양보하며 관녕을 천거해 조서가 내려졌고, 관녕은 「초망신」이라 칭하며 글을 올려 사양했다. 황초부터 청룡까지 징명이 이어졌고 해마다 8월에 소와 술을 내렸다. 연도는 명제 즉위(226)~태화로 둠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11 「明帝即位,太尉華歆遜位讓寧」
정시 2년 도구일 등이 천거해 안거와 포륜으로 불렀으나 도착 전에 84세로 죽는다.
정사 관녕전: 정시 2년 태복 도구일·영녕위위 맹관·시중 손옹·중서시랑 왕기가 천거해 안거와 포륜, 속백과 벽으로 맞게 했으나 마침 관녕이 죽었고 84세였다. 아들 관막을 낭중에 임명했다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11 「會寧卒,時年八十四」
| 항목 | 전성기 수치 | 근거 |
|---|---|---|
| 통솔 | 평가 불가 | 정사에 능력을 가늠할 기록이 거의 없어 낮은 근거로 둔 값 |
| 무력 | 평가 불가 | 무력 기록은 없다. |
| 지력 | 79 | 유가 학문에 통해 오래 은거하며 조정이 거듭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(관녕전). |
| 정치 | 58 | 황초 4년 화흠의 천거로 불렸고 명제는 안거와 비단·옥으로 불렀으나 늙고 병들었다며 사양했다(관녕전). |
| 매력 | 89 | 아버지 상 때 사람들이 부의를 보냈으나 재산만큼 장례를 치르고 모두 사양했다(관녕전). |
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,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「평가 불가」로 둡니다.
지도에서 보기 — 관녕의 이동 경로