출생 생년 불명 — 생년 기록 없음(약관에 비서리로 입사)
사망 278년 — 함녕 4년(278) 졸 — 전문 「咸寧四年卒」
| 연도 | 지명 | 직책 | 근거 |
|---|---|---|---|
| 263년 | 성도 | 비서령(후주 시종) | 기록 |
| 264년 | 낙양 | 관내후→안양령 | 기록 |
| 272년 | 낭중 | 파서태수 | 기록 |
근거 칸의 「추정」은 기록에 장소가 직접 적히지 않아 앞뒤 기록으로 정한 위치입니다.
| 연도 | 소속 | 직책 | 근거 |
|---|---|---|---|
| 233~262년 | 촉한 | 비서리→영사→랑→령(내직, 황호와 이웃) | 불명 |
| 263년 | 촉한 | 비서령(후주 시종) | 기록 |
| 264년 | 진(晉) | 관내후→안양령 | 기록 |
| 265~271년 | 진(晉) | 관내후→안양령 | 불명 |
| 272년 | 진(晉) | 파서태수 | 기록 |
| 273~277년 | 진(晉) | 파서태수 | 불명 |
| 278년 | 진(晉) | (졸) | 불명 |
경요 6년 후주가 등애에게 항복하는 글을 지어 올린다.
정사 극정전: 경요 6년 후주가 초주의 계책을 따라 등애에게 항복을 청하는 사자를 보냈고 그 서신은 극정이 지은 것이다.
연의: 연의 119회
출전: 三國志 卷42 「後主從譙周之計遣使請降於鄧艾其書正所造也」
종회의 난 뒤 후주가 낙양으로 옮겨 갈 때 단신으로 따르며 후주를 잘 인도해 후주가 뒤늦게 알아본다.
정사 극정전: 이듬해 정월 종회가 성도에서 난을 일으켜 후주가 낙양으로 이주할 때 촉의 대신 가운데 따라가는 이가 없었으나 극정과 장통만 처자를 버리고 단신으로 시종했고, 후주는 극정의 인도를 받아 거동에 흠이 없어 "극정을 늦게 알아본 것이 한이다"라고 탄식했다.
연의: 연의 119회
출전: 三國志 卷42 「惟正及殿中督汝南張通捨妻子單身隨侍」 / 三國志 卷42 「後主賴正相導宜適舉動無闕」
태시 8년 조서로 파서태수에 임명된다.
정사 극정전: 태시 8년 조서가 "극정은 성도에서 어려움 중에도 의를 지켜 충절을 어기지 않았고 일을 맡자 마음을 다했다"며 파서태수로 임명했다.
연의: 연의 해당 없음
출전: 三國志 卷42 「其以正為巴西太守」
| 항목 | 전성기 수치 | 근거 |
|---|---|---|
| 통솔 | 평가 불가 | 군사 기록은 없다(극정전). |
| 무력 | 평가 불가 | 무용 기록은 없다. |
| 지력 | 71 | 후주가 조위에 항복하는 서신을 직접 지었다(극정전). |
| 정치 | 64 | 파서태수로 치적이 있다는 조서가 있다(극정전). |
| 매력 | 63 | 후주 곁을 끝까지 지키며 낙양으로 따랐고, 환관 황호와 30년 가까이 이웃하며 미움도 사랑도 받지 않아 환난을 면했다(극정전). |
수치는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지도에서 매긴 값이며, 근거 기록이 없는 항목은 「평가 불가」로 둡니다.
지도에서 보기 — 극정의 이동 경로